1500년 역사가 살아있는 금산으로의 여행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冶隱) 또는 금오산인(金烏山人),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11세에 처음으로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웠고, 18세에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의 아문(衙門)에 나아가서 『논어』와 『맹자』등을 읽고 비로소 성리학을 들었다. 후일 세상 사람들이 그의 뜻을 추모하여 금산의 성곡 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하였고,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일컬었다.
자는 원직, 호 도소재, 본관 반남, 문정공상충의 조카 상경의 아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 방원과 친교가 두터웠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조선 태종이 몇 차례나 은둔지에 찾아와서 벼슬에 나오기를 간청했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도소재라는 호를 내리고, 그 동네 이름을 제용동이라 부르게 했으며 전답과 물품을 하사했으나 받지 않았다. 남일면 마장리 숭모사에 배향했다.
자는 무중, 호는 시남, 본관은 기계, 참봉 양증의 아들이다. 김상헌, 김장생의 문인으로 인조 14년(1636)병자호란 때 설서로서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임천으로 귀양갔다.인조 17년(1639) 귀양에서 풀려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인 금산으로 돌아와 윤선거와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제서원을 열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 본관은 파평. 김집의 문인으로 1633년 생원, 진사양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636년 후금의 사신이 입국 했을 때 유생들의 소두(疏頭)가 되어 사신을 죽이고 명나라에 의를 지키자고 상소했다. 병자호란 이후 금산으로 돌아와 유계와 같이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제서원을 열고 평생을 학문의 연구와 후학의 교육에 정진했다.
자는 회가(晦可), 호는 역천(櫟泉), 본관은 은진, 준길의 후손이며, 요좌의 아들이다. 15세에 토림(土林)에 중망이 높았으며 뒤에 추천을 받아 충청도도사,지평, 장령, 서연관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사화를 피하여 제원면 용화리 용강서원에서 성리학을 강론하니 지방유림이 운집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 지방의 교육에 공이 크다.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 본관은 안동, 대사성 창협의 손자이다. 숙종 45년(1719) 진사가 되었으나 1722년 신임사화 때 종조 창집이 4대신의 한사람으로 사사되고 일가가 모두 유배되자 어머니의 배소(配所)를 따라 금산에 와서 맹자, 이이, 송시열의 저서를 탐독하고 용강서원에서 유생들을 교육하여 명성이 높았다.
최초 천주교회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진산 출신으로 정약용(丁若鏞)의 외사촌이다. 1784년(정조 8) 서울에 올라가 김범우(金範禹)로부터 처음으로 천주교서적을 빌려보았고, 3년 후 정약용 형제들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도 비밀리에 신앙을 지켜나가던 중 1791년 어머니 권씨(權氏)의 상을 당하자,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지 아니하고 신주를 불살랐다. 이러한 사실은 곧 친척과 유림에게 알려져 불효자라는 지탄을 받게 되었고, 끝내는 관가에 고발, 곧 체포되었다. 진산군수는 여러 가지 말로 회유도 하고 위협도 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교리의 타당함을 주장하여 끝까지 신앙을 고수하였으므로, 그를 따르던 외사촌 권상연(權尙然)과 함께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여기에서도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굽히지 아니하므로, 그 해 12월 8일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신해박해 또는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 불리는 것이다.
최초 천주교 순교자. 세례명 야고보. 진산 사람으로 원래 유학을 공부하다가 고종사촌 윤지충(尹持忠)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1년 윤지충의 어머니인 고모가 세상을 떠나자 윤지충이 교리에 따라 제사를 올리지 않았는데, 그도 종래의 신주를 불사르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 해 10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역도로 몰려 윤지충이 체포되었으며,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진산관아에 자진 출두하여, 자신들이 믿는 교는 무군무부의 도가 아님을 교리를 들어 설명하면서 항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해 10월 28일 전주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하였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고 12월 8일 윤지충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 때 정조는 사형집행을 유예시키려 하였으나 이미 집행이 끝난 뒤였다. 이로써 그는 제사문제로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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