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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고향 미래의땅 금산


독립을 외침

홍범식 (1871 ~ 1910)

홍범식의 자는 성방, 호는 일완, 본관은 풍산이다. 참판 승목의 아들로 충북괴산 출신이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2년 내부주사 혜민서참서를 거쳐, 1907년 태인군수,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한일병합이 되자 분함을 참지 못하여 조종산에 목매어 자결하였다. 한일병합 때 우리나라에는 360여 명의 군수가 있었으나 정충대절의 절개를 지킨 군수는 금산군수 한 사람뿐이었다.

김용중 (1898 ~ 1975)

김용중은 1898년 3월 2일 금산읍 중도리에서 태어났다. 식민지 조국에서 갈 길을 찾지 못했던 김용중은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자영업으로 자수성가했다. 1934년 LA에서 송철 박사와 사업하며 독립지사에게 자금을 지원하였고, 신안주보 주필로써 조국의 독립을 주장하고 세계에 홍보했다. 1943년 한국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7년간 "한국의 소리"를 발간하여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였으며 수십차례에 걸쳐 독립금을 헌납하였다.

양태용 (1879 ~ 1937)

자 치도, 호 해파, 본관 남원. 효자 의열의 아들. 1910 경술국치를 당하여 할복자결을 기도하다 미수로 끝난 후 일본정부에 침략항의문을 만국공사관에 독립청원문을 발송하고 납세반대와 호적반대운동을 전개하다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학대를 받고 1937년 세상을 떠났다. 비가 금산읍 아인리 구름고개에 있다.

유진산 (1905 ~ 1974)

호는 옥계(玉溪). 본명은 영필(永弼). 진산은 필명이다. 금산(錦山) 출생. 1919년 3·1운동 때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자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42년 만주로 망명, 충칭[重慶] 연락원이 되었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강제송환되었다. 8·15광복 후에는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 1954년 이래 국회의원에 7회 연속 당선되고 야당의 중진으로 활약하였다. “토론하고 타협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라는 소신을 피력한 바와 같이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회고록으로 《해 뜨는 지평선》이 있다.

송철 (1894 ~ 1986)

송철은 1894년 2월 27일 금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이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송철은 졸업 후 신명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6년 상해를 경유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중가주의 Dinuba에서 K&S Jobbers를 설립하여 농산물 포장과 판매로 성공하여 1972년 동지회관에서 무궁화한국학교를 설립하고 2세 민족교육에 앞장섰는데 그 학교가 현재 미국에서 제일 큰 한국학교인 남가주한국학원으로 발전하였다.

임영신 (1899 ~ 1977)

임영신은 금산군 출신으로 1899년 11월 20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교육활동 외에 독립운동에도 종사하여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19년의 전주 3․1만세운동으로 잡혔다가 1919년 6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10월 대한여자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고, 1946년 9월 한국 민주의원 의원을 지냈으며 1948년 8월 초대 상공부장관이 되었다. 또한 1949년 9월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리고 1953년 2월 중앙대학교 총장, 1961년 11월 중앙문화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임희재 (1919 ~ 1971)

극작가. 금산 출신.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을 중퇴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엽에는 인쇄소 등에서 일하다가 광복 직후 해주에서 아마추어극단 활동도 하였지만 분단과 함께 월남, 중등교 교사와 신문사 기자도 하였다. 그러다가 6·25사변이 끝난 직후인 1954년도에 단막희곡 〈기류지 寄留地〉로 등단하였다. 그 뒤 〈복날〉·〈무허가 하숙집〉·〈고래〉 등의 단막극과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라는 장막희곡 1편을 썼다. 그는 희곡창작에만 국한하지 않고 〈초설〉·〈종전차〉·〈산하금지〉 등의 시나리오와 〈아씨〉 등 텔레비전 연속드라마도 많이 썼다. 그런데 그가 주로 묘사한 것은 6·25사변으로 황폐화된 도시 철거민의 생존양상이며 죽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구수한 서민들의 인정을 강렬하게 부각시키려 하였다. 극작 외에 월간잡지 ≪여성계 女性界≫를 주간하는 등 폭넓게 활동하였다.

  • 담당부서 : 문화공보관광과 문화예술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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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1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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