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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고향 미래의땅 금산


칠백의총

칠백의총 사진

칠백의총관광명소

칠백의총은 임진왜란(1592) 당시 1만 5천의 왜군과 싸우다가 수적 열세였지만 적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장렬히 전사한 700 의승병들의 유해를 모신 호국영령의 성지이다.

사적 제105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이곳은 조선 선조 36년(1603)에 ‘중봉조헌선생일군순의비’가 세워지고, 인조 25년(1647)에 종용사를 세워 700의사의 위패를 모셨지만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만행에 의해 의총은 허물어지고 순의비는 폭파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후 해방을 맞이하고 일부 복원 되었다가 1963년 국가에서 묘역 확장과 함께 순의비를 완전하게 복원하고 1970년에 기념관과·칠백의사순의탑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순의탑은 칠백의총 사역의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전적지인 연곤평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서있는 이 탑에는 한글로 ‘칠백의사순의탑’이라, 13.8m의 탑신 전면에 새겨 넣었다. 글자가 새겨진 전면 상단부는 동으로 제작된 창과 방패를, 하단의 귀부는 화강암에 용을 새겨 놓아, 칠백의사의 의로운 죽음을 장엄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의병장 중봉조헌(1544∼1592)과 의승장 영규대사(?~1592)는 청주성을 점령하고 청주 남방에 위치하고 있는 호서지방 점령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왜적을 협공하여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지만, 이후 조헌선생의 의병과 영규대사를 포함한 의승병들은 조헌선생의 지휘 하에 금산전투에 임하고 왜군을 협공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조헌선생과 영규대사를 포함한 의병과 승병 모두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으면서 오늘의 칠백의총이 탄생했다.

찾아오시는 길

  • 내비게이션 명칭검색 : 칠백의총
  • 주소검색 : 충남 금산군 금성면 의총길 40
  • 가는 길 안내

    대전통영고속도로 금산IC에서 금산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계속직진, 금산IC 기준 3.3km 전방 중도오거리에서 다시 우회전. 1.5km 전방 양전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1.4km 전방에 의총사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0.8km 전방이 목적지다.

문화재정보

  • 종목 : 사적 제105호
  • 명칭 : 칠백의총(七百義塚)
  • 분류 : 유적건조물, 인물사건, 인물기념 / 순절지
  • 수량-면적 : 135,693㎡
  • 지정(등록)일 : 1963.01.21

여행팁

  • 관람시간은 하절기 09:00~18:00 이고 동절기는 09:00~17:00.
  •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하며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개관, 관람료는 무료.
  • 안내 및 문의전화 041-753-87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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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명소 칠백의총

임진왜란을 예견한 중봉 조헌

임진왜란당시 호국의 일념으로 붓 대신 칼을 들고 의병을 일으킨 선비 중봉 조헌. 조헌선생은 율곡 이이, 토정 이지함과 같은 역사적 인물로부터 수학하고 학문을 교류 했을 만큼 학식이 뛰어난 선비이면서 임진왜란의 발발을 예견하고 수차 상소하여 왜구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조헌선생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중봉 조헌

국방강화상소도:591년 장차 국난이 올것을 예견하여 국토방위의 방책을 강구하도록 상소하는 장면이며 당시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임진국난을 당하게 되었다.

중봉 조헌

근왕창의도: 1592년 조헌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국왕을 보호하고 강토를 수복할 의병을 모으고자 궐기하는 장면

조헌선생은 이후 옥천으로 내려와 지내다가 임진왜란의 발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미 왜란을 예견하고 옥천으로 내려와 스스로 의병이 되어 왜군과 싸울 각오가 되어있었던 조헌선생은 청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옥천으로 내려와 의병모집에 나섰다. 옥천은 수년간 조헌선생이 머물렀던 곳이라 문하생(門下生)과 지인(知人)들이 많아서 이들의 도움으로 옥천에서 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는데 성공한다.

칼을 든 선비 중봉 조헌

조헌선생이 이끄는 의병의 첫 전투는 인근 보은의 차령에서 왜구와의 격전으로 치러졌으며 이 첫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시키는 성과를 올린다. 이에 힘입어 호서와 영남에 의병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띄워 그 결과 많은 장정이 의병에 합세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중봉 조헌

토적맹약도: 왜적을 토벌하라는 교서를 받고 1592년 7월 4일 하늘에 제사하고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맹서하는 장면

10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보은의 차령에서 왜군을 물리친 조헌선생은 청주성 탈환을 위한 전투를 맞게 된다.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청주 남방에 위치한 호서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는 청주 방어사 이옥의 군대가 잇달아 무너지고 오로지 승장 영규대사의 승병만이 홀로 왜군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중봉 조헌

청주성탈환도: 조헌선생이 이끄는 1,600여 명의 의병이 영규대사 휘하 1,000여 명의 승병과 합세하여 1592년 8월 1일 청주성을 탈환하는 장면

중봉 조헌

전략회의도: 조헌선생이 영규대사와 함께 휘하참모 이광륜, 임정식, 김절, 이려, 곽자방 등과 싸움에 임하면서 전략을 협의하는 장면

조헌선생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청주로 향하였다. 선생은 도중에 방어사 이옥을 만나 그의 군사 오백 명을 청주로 진군토록 하는 한편, 자신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승장 영규와 의기투합한 선생은 방어사 이옥의 군대도 합세할 것을 촉구하여 이옥이 연기현(조치원)에서 진군하여 선생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 이옥의 관군은 마침내 합군(合軍)하여 선생의 지휘아래 청주성을 공략,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수복하기에 이른다.

청주성의 수복은 청주지역의 회복만이 아니라 왜군이 호남지역과 충청도로 진출하는데 교두보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큰 쾌거였다.

나라사랑의 거울 칠백의 총

청주성 전투에서 처음 만나 청주성을 탈환 해 큰 공적을 세운 조헌선생과 그의 의병. 그리고 영규대사와 그의 승병은 호남순찰사 권율과 협력하여 호남 진출의 교두보로 금산을 장악하려는 왜군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에 이른다. 싸움에 앞서 왜군의 동태를 파악해 본 권율은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아 수 적 열세로 패할 것을 예상하고 조헌선생에게 작전을 바꾸고 기일을 늦추자는 편지를 보냈으나 조헌선생은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약속한 기일에 출병을 감행한다.

칠백의 총

금산혈전출진도: 청주성 탈환 후 700여명의 의승병을 거느리고 금산의 적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진하는 모습

당시 조헌선생의 의승병과 왜군이 맞서 싸운 격전지는 연곤평, 칠백의총 인근이다. 왜군 15,000명, 아군 700명. 20대 1, 혈전의 전장으로 뛰어 든 조헌선생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은 죽음을 무릅쓰고 왜군을 물리치려 했으나 수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칠백의사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전공을 세웠지만 모두 전사하기에 이른다.

칠백의 총

금산혈전순절도: 조헌선생과 영규대사가 이끄는 칠백의사가 1592년 8월 18일 금산 연곤평에서 최후의 일인까지 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하는 장면

칠백의 총

칠백의총: 묘 옆에는 1603년 4월에 해평부원군 윤근수가 비문을 짓고 김현성이 쓴 원비 ‘중봉조선생일군순위비’모형비가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1971년 문화공보부가 비문을 번역하고 요약해 놓은 ‘중봉조선생일군순의비 요약’ 동판이 당시의 전투상황과 이후 후손들이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마음을 전하고 있다. 비의 원본은 외삼문 영역에 있다.

1592년 8월 18일(음), 중봉 조헌선생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들이 전사한 날이다. 그로부터 나흘 뒤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이 격전지 인근에 터를 잡고 순의한 칠백의사의 유해를 한 무덤에 모심으로써 호국영령의 성지 칠백의총은 탄생됐고 조선 선조 16년(1603)부터 그들의 순절를 기리고 나라사랑의 거울로 삼고 있다.

사적 칠백의 총

칠백의총은 관리사무동이 마련된 공간과 외삼문 공간 내삼문 공간 등 세 공간으로 구분지어 있다. 매표 및 관람 안내실이 마련된 칠백의총의 정문을 지나 외삼문을 들어서면 외삼문과 내삼문사이 비각과 기념관이 마주보고 있는 넓은 공간으로 들어서게 된다. 정성들인 조경이 마음을 더욱 숙연하게 하는 이곳은 동서로 마주보고 있는 비각과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칠백의 총

중봉 조헌선생 일군순의비: 비각 안에는 조헌선생이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싸움에서 순국하기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중봉 조헌선생 일군순위비’가 있다.

칠백의 총

중봉 조헌선생 일군순위비: 선생의 의병행적을 알리고 있다.

칠백의 총

기념관: 1976년 건립된 기념관은 칠백의사의 전투모습 등 행적을 그린 7폭의 기록화와 칠백의사를 추모하여 왕이 내린 제문을 비롯하여 칠백의사와 관련된 유물 107점이 진품으로 보관․전시되고 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단 높은 곳에 정 중앙으로 자리 잡은 ‘종용사’를 마주하게 된다. 1647년 당시 호서․호남지방의 유림에 의해 건립되었고 1663년 현종이 ‘종용사’라는 사액을 내려 오늘에 이른다. 사당 뒤로는 1만 5천의 왜병과 맞서 싸우다 전사한 7백의승병의 무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무덤은 조헌선생의 제자인 박정량, 전승업 등이 그들의 유해를 거두어 모신 무덤이다.

칠백의 총

종용사: 1663년 현종이 종용사라 사액하여 금산싸움에서 순절한 의사 21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었으나 1940년 일제의 항일유적말살정책에 의해 훼손되었다가 1952년 복원 후 1971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칠백의 총

칠백의총: 종용사 뒤 사역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칠백의 총

칠백의총 외삼문 앞 연못: 칠백의총은 탐방객이 쉬었다 갈 수 있는 아담한 연못이 마련되어 있다.

칠백의 총

비단잉어가 노니는 이 연못: 안내소에서 판매하는 비단잉어 먹이(500원)를 구입해서 직접 먹이를 줄 수 있다. 사람이 다가가면 먹이를 주는 줄 알고 비단잉어들이 모여든다.

칠백의 총

칠백의총과 마주보는 자리에 세워진 칠백의사 순위탑 가는 길: 도열하듯 길가에 서있는 소나무들

칠백의 총

칠백의사순위탑: 탑 주변을 “빙” 둘러 숲이다.

  • 담당부서 : 문화공보관광과 문화예술팀
  • 연락처 : 041-750-2381
  • 최종수정일 : 201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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